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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설의 시초, 전기소설

 
 '이야기'와 '이야기와 거리를 두고 있는 화자'를 지닌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서사라는 갈래는, 크게 '설화'와 '소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설화와 소설의 구분은 단순하게 하자면 '표현매체'의 차이로 볼 수 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구비문학 '설화'와 글로써 쓰여진 '소설'.

 하지만 글로 기록된 설화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분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품의 형식과 내용 면에서 설화와 소설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한 논의는 조동일이나 박희병의 글에서 찾을 수 있으나, 머리가 아픈 이야기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100% 납득하는 결론이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설화와 소설 구분짓기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작품이 '최치원'입니다. 불운했던 육두품 지식인 최치원의 고독과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을 과연 설화로 볼 것인가, 소설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만약 '최치원'을 소설로 인정하게 된다면 한국 최초의 소설은 조선 시대의 '금오신화'가 아니라, 신라 말~고려 초의 '최치원'이 됩니다. 여담이지만, 만약 최치원이 소설로 인정이 된다면 일본이나 중국에서 10세기 전후에 소설이 등장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우리도 소설을 창작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지요.

 사실 최치원은 전기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특징을 많이 지녔습니다. '고독한 주인공', '시를 통한 내면의 제시', '현실에서는 성취될 수 없는 행복' 등은 금오신화의 여러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지요.

 뜬 구름 같은 세상의 영화는 꿈 속의 꿈이니
 하얀 구름 자욱한 곳에서 이 한 몸 깃들리라.


 최치원의 줄거리는 퍽 단순합니다. 당나라에 유학을 가 있던 최치원이 두 사람의 여인이 묻혀있는 쌍녀분에서 시를 짓습니다. 그 시 덕분에 최치원은 무덤 속의 두 여인과 만나 하룻밤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고, 동이 터옴과 동시에 이별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치원은 이별의 슬픔을 안고, 고국에 돌아온 후 속세를 떠나게 되지요.

 귀신과 사랑을 나누고, 이별 후 허무함에 속세를 떠난다는 구조는 금오신화의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대개 귀신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정말 행복한 시간으로 그리지요. 허나, 이는 바꾸어 말하면 귀신과 지냈을 때밖에 행복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소설들의 주인공이 속세를 등지는 것은, 속세로 칭할 수 있는 현실에서 행복할 수 없다는 뜻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전기소설의 주인공이 속세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것은 전기소설의 작자가 대개 현실에서 소외된 인물이기 때문으로 추측합니다. 금오신화를 지은 김시습은, 정치권력에서 멀어져 홀로 방황하는 '방외인'의 대표주자였습니다. 5세 때 세종 앞에서 시를 지으며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 '오세'라고 불리기도 하던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관직으로 나가고자 하는 뜻을 버리고 승의 길을 걷습니다. (물론 인생 중간중간에 속세로 돌아오고자 하는 시도도 몇 번 했습니다. 당대의 권신이었던 서거정에게 은근히 벼슬을 구걸하기도 했지요. 허나, 그의 인생은 결국 방외인으로서 끝이 났습니다.)

 마음이 세사와 상반되니 시를 빼놓으면 즐길 것이 없다

 당당히 정치 현실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하는 꿈이 좌절되었을 때, 자신이 바라마지 않던 세계가 붕괴되었을 때, 김시습이 느낀 고독은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그런 고독 속에서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며 지은 금오신화에는, 김시습의 고독이 잔뜩 묻어있습니다.

 이는 6두품의 신분이었던 최치원에게서도 찾을 수 있는 감정입니다. 비록 최치원이 직접 '최치원'을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던 사람이 '최치원'을 지었을 거라고 생각해보면, 세상과의 어긋남을 얼마나 느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고독한 사람들이, '고독한 주인공'을 만들어 내고, 그 고독한 주인공은 '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읊으며, '환상' 속에서만 자신을 알아주는 존재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귀신이건, 용왕이건, 염라왕이건 말이지요.

 이런 전기소설의 모습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약간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후기 전기소설이라 불리는 '운영전', '최척전', '주생전' 등은 '기이함'이라는 성질이 옅어짐과 동시에 각각 기존의 전기소설에서 탈피하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운영전에서는 '특'이라는 간악한 노비가 등장함으로써 부정적 인물의 출현을 고했고, 최척전에서는 네 개 국가를 무대로 하여 배경의 확대를 보여주었으며, 주생전에는 욕망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해서 전기소설의 맥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다양한 갈래의 소설이 창작되기 시작합니다. 영웅소설, 가정소설, 우화소설, 가문소설, 몽자류 소설, 몽유록계 소설, 판소리계 소설 등등 나누자면 무수히 많이 나누어질 만큼 많은 종류의 소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영웅소설과 판소리계 소설인데요,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포스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는 자이기에
 진채(陳蔡)의 사이에 바쁜 것인가?
 가는 곳곳 대부분 뜻에 안 맞아
 마음과 일 더더욱 서로 걸린다.
 장안 길에 구름 아득하고
 월협 여율에 바람 휘감아 돈다.
 유유한 하늘과 땅 사이에
 누가 백구처럼 한가하겠나?

 김시습, 무엇을 하려는가(何爲)

by 아침의전령 | 2011/10/02 23:10 | 문학사 | 트랙백 | 덧글(0)

기나긴 이야기가 필요할 때, 가사

 
 가사는 시조와 함께 조선 시대 대표적인 운문입니다. 시조가 3장 구성을 통하여 짧은 감회를 표출하는 갈래였다면, 가사는 1행 4음보라는 제약만 지킨다면 그 길이에 제약이 없어 기나긴 이야기를 풀어 말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기나긴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었기에, 뭔가 좀 길게 이야기하고 싶다 하는 게 생기면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가사에 실어 읊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유배 체험이건, 강호자연에서 즐기는 취락이건, 국내 여행을 돌아다녔던 체험이건, 가사가 포용하는 내용은 매우 다채로웠습니다.

 덕분에 가사는 한국 고전문학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골치덩어리이기도 합니다. 이걸 개인의 정서가 중심이 되는 서정 갈래로 바라보아야 할지, 이야기 세계가 중심이 되는 서사 갈래로 바라보아야 할지, 작자의 이념을 전달하기 위한 교술 갈래로 바라보아야 할지, 그도 아니면 무언가 새로운 갈래를 만들어 거기에 속한다고 해야할지.

 이런 가사의 갈래 귀속 문제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숙제이기는 합니다만, 가사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조금은 해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조선 전기의 가사는 대개 사대부가 지은 서정적인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교과서에도 빠짐없이 실리는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이 시기 유배·연군가사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지요. 그 외에도 관동의 풍경을 유장하게 서술하며, 관찰사로서 포부를 드러내고 있는 관동별곡이나, 강호자연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노래한 상춘곡, 면앙정가 등도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가사 작품이지요.

 갓 익은 술을 두건으로 받아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 놓고 먹으리라
 和風(조화로운 바람)이 건듯 불어 녹수를 건너오니
 淸香(맑은 향기)은 잔에 지고, 落紅(붉은 꽃잎)은 옷에 진다
                                                    - 상춘곡 中

 대개 이 시기의 작품은 강호에서 사대부의 흥취나, 국내 여행의 체험, 유배지에서의 아픔과 연군을 노래하는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지나며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임란과 호란 이후, 문학은 한층 더 현실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수묵화 같이 청정하고 고아한 강호자연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식량을 생산하기 위한 삶의 터전으로서 자연이 부각되며, 힘든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를 그려내는 작품이 등장하고, 개인적인 욕망이 작품 내에 스스럼 없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와중에 가사는 서정적인 면이건, 서사적인 면이건, 혹은 교술적인 면이건 어느 한 쪽 면이 극도로 부각되는 작품들이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서사적인 가사나, 교술적인 가사를 주목해볼 수 있겠는데요, 교술적인 가사는 대개 불교의 이념을 노래하거나, 기독교의 이념을 노래하거나, 혹은 동학의 이념을 노래하는 등, 종교를 포교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을 대표로 들 수 있습니다.

 좀 더 내용이 재미있는 것은 서사적인 작품인데요, 그 중에서도 '노처녀가'나 '덴동어미화전가'가 주목해볼 만합니다. 노처녀가는 제목 그대로 노처녀가 주인공인 가사로, 나이도 많이 먹었고, 몸에도 이런 저런 문제가 있어 시집도 못 가는 주인공이 꿈에서나마 시집을 갔다가 개 짖는 소리에 잠을 깨고, 한탄하다가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허수아비랑 결혼식을 하는데, 이걸 발견한 가족들이 불쌍히 여겨 어떻게든 혼인을 시켜주는, 다분히 민담적인 해피엔딩~해피엔딩~ 류의 가사입니다. 4음보 율격체가 아니었으면, 그냥 민담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내용을 지니고 있지요.

 '덴동어미화전가'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과도 비견될 만한(실제로 비교한 논문이 있습니다) 비극적인(?) 작품입니다. 여기서 '화전가'는 원래 부녀자들이 꽃놀이 나가서 부르는 즐거운 노래인데요, '덴동어미화전가'는 화전가의 형식에 덴동어미의 일생이 무려 '액자형식'으로 삽입되어 있는 가사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덴동어미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제 남편만 잘 만나면 행복한 일생이 이어질 거라고 예상되었지요. 그런데 그의 첫 번째 남편이라는 인간이 그네를 타다가 떨어져서 사망합니다. 덴동어미는 친정으로 돌아가서 밤낮으로 통곡만 하지요, 그걸 딱히 여긴 부모가 관아에서 잡일을 맡아 보는 남자와 재혼을 시켜줍니다. 이제야 행복한 일상을 찾나 싶더니, 삼정의 문란 덕분에 쌓아둔 재산은 다 털리고, 화병으로 죽거나, 곤장에 맞은 후유증으로 죽거나, 가족들도 하나둘 덴동어미의 곁을 떠나 갑니다.

 어쩔 수 없이 덴동어미 내외는 천민으로 몰락해 머슴살이를 시작합니다. 그래도 머슴살이를 열심히 하며, 이렇게 돈을 모으다보면 적당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다는 꿈을 꾸는 찰나에, 전염병이 창궐하며 덴동어미를 제외한 사람들이 몰살당합니다. 물론 여기는 덴동어미의 두 번째 남편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덴동어미는 '이 세상 천지간에 이런 일이 또 있는가' 하며 한탄을 합니다. 하지만 혼자 몸으로 계속 삶을 이어나가기는 힘들었기에, 자신과 유사한 처지인 황도령과 다시금 결연을 맺게 되지요.

 삼십 넘은 노총각과 삼심 넘은 과부, 가련한 두 사람이 만나 이제는 좀 행복해보자고, 인생사 고진감래 아니겠냐고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들에게 행복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천둥이 치며, 소낙비가 쏟아지는 어느날 주막 뒷산이 무너지며 황도령은 사망하고 맙니다. 불쌍하고 또 불쌍한 덴동어미는 이럴 바에는 전염병에 죽었으면 이런 꼴을 안 볼 것을 하며 한탄하지요.

 덴동어미는 결국 좌절하여 혼자 지내는데, 또 주위에서 결혼을 하라 말이 들어옵니다. 덴동어미는 갈까 말까 망설이나 마지못해 허락하고 엿장사를 하는 영감과 새로이 살림을 차리게 됩니다. 그렇게 한 삼 년 살다보니 옥동자가 하나 탄생했습니다. '나이 오십의 첫 아이'이지요. 이게 바로 고진감래구나! 금자동아 옥자동아를 외쳤는데, 이게 웬 일일까요. 한밤중에 불이나 남편은 죽고, 아들은 병신이 되었지요.

 이렇게 한탄한 덴동어미는 최근에 남편상을 당한 처자에게 재혼 같은 건 하지 말라고 권유를 합니다. 그리고 화전놀이의 노래가 이어지며 이야기는 끝이 나지요.

 남편을 네 번이나 잃은 덴동어미의 비참한 삶은, 조선 후기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얼마나 비참하게 생각했는지를 대변하지 않나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그것보다는 덴동어미화전가의 서사성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한 편의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내용이, 가사의 형식만 빌어서 유통되고 있었던 거지요.

 즉 이런 식으로 조선 후기의 가사는, 서사성이 극대화되거나, 아니면 교술 혹은 서정성이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다양한 작품이 유통되었습니다. 덕분에 가사의 갈래를 어디라고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러던 것이 개화기에 들어서자, 가사의 내용은 다시금 협소해집니다. 개화를 찬미하거나, 아니면 현실을 비판하는 교술성이 짙은 작품군들만 탄생하게 되지요. 이는 당시 조선, 혹은 한반도의 현실이,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으로 급박했던 데 하나의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개화를 노래하거나, 그 개화의 꿈이 좌절되었을 때 남아있는 비통한 현실을 비판하거나 하는 데만도 역량을 쏟기에 부족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협소해진 가사는, 결국 소설로 대표되는 서사 갈래의 강화와, 자유시로 대표되는 정형률에서의 탈피 움직임에 휩쓸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기나긴 이야기를 담고자 했던 가사라는 형식은, 그를 대신해서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소설이라는 형식이 대중화됨으로서 의미를 잃었고, 나아가 자유로운 감정의 표출을 방해할 수밖에 없는 정형률이라는 형식은 분량과 내용의 면에서 제약이 없는 자유시라는 형식이 새로이 등장하면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지요.

 결국 가사는 1900년대 초반, 현실비판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운 채 조용히 사라져갔습니다.

by 아침의전령 | 2011/09/13 20:01 | 문학사 | 트랙백 | 덧글(0)

사대부의 흥을 노래하다, 시조(2)

 
 지난 번 포스팅에서 시조는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고, 사대부들은 왜 시조를 불렀을까를 간단히 알아보았다면, 이번 글에서는 시조의 역사적 전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우선 조선 전기의 시조는 강호자연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은거하며, 그 풍류를 노래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풍류라는 것이 지은이의 성격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조선 전기 훈구파가 지은 대표적인 시조로는 강호사시가를 들 수 있습니다.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 계변에 금린어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맹사성이 지어 부른 강호사시가의 1연입니다. 탁료 계변은 '막걸리를 마시며 시냇가에서 노는 것'입니다. 즉 이 1연은 강호자연에서 느끼는 봄의 풍류를 노래하고 있지요. 2, 3, 4연도 유사한 구조를 통해서 각각 여름, 가을, 겨울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결국 강호사시가 전체는 강호에서 누리는 사계절의 풍류를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역군은'이라는 표현입니다. 화자가 강호에서 이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군주의 은혜' 덕분이라는 구절인데요, 여기서 우리는 '君'으로 대변되는 정치현실과, 강호로 대변되는 은거하는 삶의 형태를 둘 다 긍정하는 화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맹사성에게 정치현실과 강호자연은 함께 긍정할 수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낙관은 맹사성이 정치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훈구파라는 것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주로 개국공신으로 이루어진 훈구파에게 정치현실이란 갈등이 없는 조화로운 곳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정치현실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조화로운 곳이라는 인식이 작품에서 은연 중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낙관으로 가득 찬 시조는 이후 정치현실이 어지러워지면서 현실에 대한 부정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 중에 시름 없으니 어부의 생애로다
 일엽 편주를 만경파에 띄어 두고
 인세(人世)를 다 잊었거니 날 가는 줄을 안가

 구버는 천심녹수 도라보니 만첩청산
 십장홍진이 언매나 가련는고
 강호에 월백하거든 더욱 무심하얘라

 장안을 도라보니 북괄이 천리로다
 어주에 누어신들 니즌 스치 이시랴
 두어라 내 시름 아니라 제세현(濟世賢)이 없스랴

 이현보의 어부단가 1장, 2장, 5장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강호자연과 정치현실의 날카로운 대립을 엿볼 수 있습니다. 1장에서 화자는 자연에서 어부로 노닐며, 인간 세상(人世)를 다 잊었다고 합니다. 맹사성이 자연 속에 노닐며 임금을 함께 찬양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현보는 '인세'로 대변되는 정치현실을 잊어야만 행복한,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천길 푸른 물인 '천심녹수'와 첩첩이 쌓인 푸른 산인 '만첩청산'으로 대변되는 강호자연과, 열 길이나 되는 속세의 붉은 먼지인 '십장홍진'으로 대변되는 정치현실이 언급되는 2장에 오면 그 대립은 극도에 달합니다. 진술상으로 십장홍진은 천심녹수와 만첩청산에 철저히 차단되어 있고, 더군다나 붉음과 푸름이라는 색채의 대비까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듯 강호자연과 정치현실은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현보가 살았던 시대가 네 차례의 사화가 있었던 시대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정치현실이란 어지럽고, 발을 들여놓아봤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는 곳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 몸을 누일 수 있는 강호자연이란 더욱 더 소중한 공간이었을 테고요.

 하지만 역시 사대부로 태어난 입장에서 정치현실을 완전히 잊기는 어렵습니다. 사대부 자체가 자연에서 은거하는 것(사)과 정치현실에 참여하는 것(대부)의 합성어라서였을까요. 스스로의 뜻을 펼칠 수 있을 때 정치현실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떨쳐야 할 사대부에게 정치현실이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것이었나 봅니다.

 어부단가 5장에서 이현보는 그렇게 부정했던 정치현실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강호에서 유유자적하게 노닐다가도, 장안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 와중에도 결코 잊은 적이 없다는 진술을 하며, 정치현실에서 떨어질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정치현실과 강호자연의 대립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이황의 도산십이곡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산전(山前)에 유대(有臺)하고 대하(臺下)에 유수(有水)이로다
 떼 만흔 갈며기는 오명 가명 하거든
 엇디다 교교백구는 머리 마음하는고

 도산십이곡 언지의 다섯 번째 연입니다. 산 앞에 천운대가 있고, 천운대 아래에 물이 흐르고, 갈매기가 오고 가는 자연 속에 묻혀 사는데, 교교백구(현자가 타던 망아지)로 대변되는 자신은 멀리(정치현실)에 마음을 둔다는 내용인데요, 자연에 묻혀서도 정치현실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대부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살펴본 작품들의 강호자연이란, 사실 현실적인 실감이 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엄격한 사대부 이념을 드러내기 위한 절제된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즉 현실보다는 이념이 중심이 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이념 중심성은 작품에 단조로움과 엄정함이라는 속성을 부여하게 되고, 덕분에 이 근처의 작품들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수묵화 같은 느낌을 주게 됩니다.

 이런 수묵화 같은 엄정한 작품에서 벗어나, 채색화 같이 다채로운 빛깔을 내기 시작했다고 평가받는 작품이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입니다. '동풍이 건듣 부니 물결이 곱게 일어난다'느니, '고운 볕이 쬐는데 물결이 기름 같다'느니 '흰 구름이 일어나고 나무 끝이 흐느낀다'느니 하는 세련된 표현은 이전 시조의 묵화적인 풍경을 탈피한 것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강호자연과 현실의 대립을 암암리에 깔고 있는 윤선도의 시조보다, 강호자연이 이념적 강호자연이 아니게 된 현실을 다루게 된 작품이야 말로 조선 후기의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도롱이에 호미 걸고 뿔 곱은 검은 소 몰고
 고동풀 뜻 머기며 깃 말갓 나려 갈 제
 어디셔 픔진 벗님 함께 가쟈 하난고

 둘너 내쟈 둘너 내쟈 길 찬골 둘러 내쟈
 바라기 역괴를 골골마다 둘너 내쟈
 쉬 짓튼 긴 사래는 마조 잡아 둘러 내쟈

 위백규의 '농가구장' 중 일부입니다. 조선 전기 같았으면 노니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공간이 되었어야 할 자연이,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는 심각한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임란, 호란을 거치며 점차적으로 강세를 띠게 된 '현실'을 노래하는 경향은, 위백규의 농가구장에 와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대부가 논밭을 가는 것은, 예전 같으면 자신의 이념을 드높일 수 없는 정치현실에 대한 불만의 표출수단이었겠지만, 이 시대에 들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을 이어나갈 수 없는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양반이 분화되면서 몰락하는 양반도 생겨나고, 일부 권력을 쥔 양반이 아니면 강호자연의 풍미는 누릴 수 없었던 시대였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중인들도 시조를 창작하는 데 한몫하게 됩니다. 중인들은 시조를 중요한 감정 표현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시조집인 청구영언이나, 해동가요 등을 편찬하기도 합니다.

 또한 서민적인 감정을 담은 사설시조가 융성하며, 지금까지 시조의 평담한 미와는 전혀 다른 골계미로 무장한 노골적인 작품들도 잔뜩 탄생하게 됩니다.

 중놈도 사람인 양하야 자고 가니 그립다고
 즁의 숑낙 나 볘읍고 내 죡도리 즁놈 베고 즁의 장삼은 나 덥습고 내 치마란 즁놈 덥고 자다가 깨다르니 둘희 사랑이 숑낙으로 하나 죡도리로 하나
 이튼날 하던 일 생각하니 홍글항글 하여라

 이런 작품처럼 성적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작품도 여럿 나타나게 되지요.

 개항을 한 이후에도 시조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지만, 율격에 제약이 있다는 문제점 때문에 그 세가 상당히 약해져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함께 해온 가사라는 갈래가 근대에 들어서 명맥을 잇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시조는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시조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큰 틀에서 보았을 때는 이념적인 것에 편중되었던 것이, 현실을 다루게 되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실상 시조 작품이란 몇 천 수에 달하기에 제대로 된 정리를 하기는 어려워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몇 가지만 자의적으로 선택해서 글을 작성했기에,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갈래란, 이렇듯 다루기 힘든 것이겠지요.

by 아침의전령 | 2011/09/02 20:48 | 문학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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